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통일한국
–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박문규 학장 / LA기윤실 실행위원,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널 대학, 정치학
I. 들어가는 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이 말은 국토가 분단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급한 기독교인들은 70년을 희년이라고 이해하는 구약성서의 개념을 한국사에 직접 적용하여 2015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남북통일의 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통일한국의 모습은 어떠할지 혹은 통일은 어떠한 방법으로 올수 있을지에 대해서 남북 합의는 커녕 남한 내에서 국민적 합의에도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박근혜대통령이 통일 대박을 외치며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더라도 그것이 내용 없는 공허한 언설로만 들릴 뿐이다. 이 글을 통해 통일 논의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적인 통일은 어떠해야 할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II. 국토의 분단과 회개
일제의 식민 통치가 끝난 1945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경제 정치 체제가 다른 두 강대국이 남북을 분단하여 점령하게 되었고, 민족은 이 강대국에 대해 국토 분단의 부당함과 통일된 새나라 건설의 당위성을 설득할 단결력도 지혜도 통찰력도 지니지 못했다. 결국 국토는 분단되었고 민족은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치 경제 체제가 자리 잡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민족이 두 국가로 분단되어 서로 원수져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국토의 분단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북의 기독교는 공산주의자의 탄앞 앞에서 무기력 하였고 남한의 기독교는 미군청에 아부하여 이권을 탐내거나 아니면 교권의 다툼에 정신이 없었다. 한국 기독교는 민족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민족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며 민족의 미래를 제시하는 운동은 회개운동에서 출발해야 함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국토가 분단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무신론적 공산 전체주의 체제가 북한에 들어선 사실에 주의하며 국토 전체가 공산화되었다면 남한의 기독교조차 말살되었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북이 공산화된 이래 남한은 하나님 앞에서 남은 무리였다. 그래서 남한과 남한 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책임은 더욱 더 컸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남한 교회는 북한 백성들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들과의 화해를 모색하지 못했고 그들을 증오했고 저주했고 원수로만 생각했던 죄를 저질렀다. 이것이 남한의 기독교가 깊이 회개해야 할 부분이다. 특별히 교회는 북침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고 한국 전쟁 중에는 휴전 반대를 외쳤고 휴전 이후에도 평화통일을 반대하고 평화주의자를 빨갱이로 음해하는데 동조했음을 회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 이셨음을 망각하고 형제를 원수라고 증오했던 죄를 범했음을 고백해야 한다.
III. 남북 화해의 시도
남북한 당국이 긴장 완화를 추구하고 냉전을 종식을 위해 노력하면서 화해와 통일 방안을 함께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의 7.4 남북 공동선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남북당국의 공동선언은 미국의 리차드 닉슨 대통령과 그의 외교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데땅뜨 정책의 영향 아래서 일어났다. 북한의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김일성의 친 동생)와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상부의 뜻을 받들어’서명한 이 공동선언은 우선 상호 비방의 방지와 남북한 당국의 직통전화를 개설 하였다. 과거에 원수라고 온갖 악담을 퍼붓던 상대를 더 이상 비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야 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으로 보면 바람직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고 그 대화의 채널을 설치한 것 역시 기독교 정신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북은 통일의 방법으로 (1)자주통일 (2)평화통일 (3)체제를 초월한 민족의 대단합을 천명하였다.
자주 통일을 외치는 북한의 속셈은 궁국적으로 주한 미군의 철수를 지향하고 있음에 틀림없었지만 북한은 그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음에 주의해야 한다. 남한 역시 북한이 미국 철수를 명시적으로 요구 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주 통일을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갖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으로 보아도 이스라엘이 외적의 위협 앞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이집트 같은 강대국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말했음을 기억할 때, 민족의 통일을 위한 주도권이 주변 열강이 아닌 민족 내에서 나아와 함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리라.
둘째, 평화 통일의 원칙은 북한으로 서는 한국전쟁 시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던 시도는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던 쓰라린 역사의 교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무력 통일의 시도는 미국의 개입을 불러오게 되어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은 이로써 평화 통일을 주장함으로 휴전 체제를 평화조약 체제로 전환시키고 미국과도 국교를 맺어 정상국가로 전환하겠다는 의욕을 볼 수 있다. 남한 역시 북한과의 무력 충돌은 북한의 무장력으로 보나 국제 질서로 보나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정책임을 깨닫게 되어 평화 통일론에 동의하는데 어렵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적으로 보아도 이제 폭력으로 상대를 구원하겠다는 방법은 결코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북진 통일론은 그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셋째, 체제를 초월한 민족의 대단합이란 남북은 서로 다른 체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상대의 체제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7.4 공동 선언은 통일선언이라기 보다는 평화공존의 선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은 상대를 인정하는 현실적 바탕에서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함께 건설할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하자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보아도 가시적인 통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가 와야 통일이 이루어짐을 알고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미래를 기다리자는 것일 것이다. 기독교는 당연히 소화해야할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7.4 남북 선언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현실적으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공통분모였으며 이 통일 방향의 보편성이 기독교적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닉슨 독트린이 천명했던 주한 미군의 철수는 이루어 지지 않아 북한은 실망하게 되었고, 남한이나 미국은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해주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북한이 군사적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잠재력에 대해 미국이 과소평가한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유신 헌법을 선포하게 되자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날 것이 분명한 반독재 저항세력을 지원하고 박정희 정권과의 교섭을 중단하기로 결심한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주도로 박정희의 최대의 정적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오자 북한은 일체의 남한과의 대화를 중지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치명적 공격을 해 오게 된다.
실질적으로 남북 대화의 발전은 7.4. 공동 성명이 채택된 지 20년이 지난 1992년에 노태우 정권하에서 남북총리회담(1990-92)의 성과로 남북 기본합의서를 발표함으로 일보 전진한다. 이것 역시 중국의 개방정책과 소련 고르바체브의 개혁 정책 그리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대 공산권 화해 정책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 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 협력 등 3개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화해와 관련해서는 상호체제의 인정과 존중, 내정불간섭, 비방중지, 상대방에 대한 파괴, 전복행위 금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로의 전환 등이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선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 졌지 구체적 정책으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몇 차례의 남북 총리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인 1991년 남한과 북한은 함께 유엔에 가입하게 됨으로 북한의 국제 사회에서의 정당한 지위가 확보되었다. 국제 질서를 주도해가는 미국은 계속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북한을 평화주의로 유도하기는 쉽지 않았다.
소련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구의 공산 체제가 파경을 맞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한편으로는 화해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핵개발을 강행하였다. 북한을 대량 학살 무기를 포기한 평화주의 국가로 유도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1990년대에 형성되었는데 북한이 곧 붕괴되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미국과 남한은 북한과의 교류의 증대에 소극적이어 남북화해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남북 교류와 긴장 완화가 본격화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일관성 있는 햇볕정책으로 진전되었고 마침내 2000년 6월 15일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몇개의 합의 사항을 발표하게 된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은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2) 남과 북은 남측의 국가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3)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 이 회담의 결실로 현대그룹과 북한이 합의하여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특구와 남북관광교류사업의 상징인 금강산특구가 개방되었다.
그 후 노무현 정권은 2007년의 정상회담을 통해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한다고 합의 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핵(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6자회담이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노력하며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경제특구를 건설하며, 한강 하구를 남과 북이 공동으로 이용한다고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였다. 또 개성공단의 2단계 건설에 착수하고,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한다는 데에 합의 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십년간 실시된 햇볕 정책은 형제가 힘들어 할 때 도와주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정책이었고 남북 분단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경감해 주자는 정책이었고 지금 통일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며 꾸준히 기다리자는 평화 공존의 정책이었고 납북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론에서 공통점을 장기적으로 찾아보자는 평화통일 지향 정책이었다.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 도덕성과 투명성 혹 효율성이 문제되기는 했으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손색없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행 방법에 있어서의 조급함과 실적위주 등으로 인해 과연 북한에 충분한 햇볕을 쬐일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일방적으로 북의 전략에 끌려가기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 협상의 뒤에는 남북 정권간의 은밀하고 비합법적이기 까지 한 금전 거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많은 이들이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고 보수주의적 이명박 정권은 실질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이루어 놓은 남북 화해의 성과를 모두 무산시켜 버렸다. 북한도 핵무장에 박차를 가하여 2012년 핵국가가 되었음을 선언하게 되자 남북의 관계는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렵게 되었다.
IV. 남북의 변화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상잔의 한국 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은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의 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믿는다. 특히 남과 북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역사가 있었음을 보며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다.
(1) 북한의 변화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있다면 1990년 소련을 포함한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 경제의 어려움이었다. 특히 1995년 이후 배급체제가 붕괴되자 북한 인민들은 극심한 경제란에 시달렸다. 100만명이 넘는 아사자들이 생겼고 많은 인구가 식량을 구하러 떠돌아다니고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가는 탈북자들을 대량으로 배출하였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을 이어 북한을을통치하던 김정일 정권은 그 정통성에 흠짐이 나기 시작했다. 인민들은 식량을 구하러 다니느라 학교에도 못가고 직장이나 지역에서 벌이는 총화교육에도 참석할 수 없고 보니 동원체제 사상교육 체제도 상당히 무너져 버렸다. 생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미세한 상업에 종사하다 보니 사회주의 경제의 상당한 부분이 붕괴되게 되었다. 북한은 중국 혹은 남한 등에서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면 생존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외부로 부터 물자뿐만 아니라 여러 정보도 들어가게 되니 북한은 과거에 유지하던 폐쇄성도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있고 이것이 다시 사상적 해이를 가져오게 되었다. 경제 발전을 위해 김정일 시대부터 소비품을 중국 물자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고 자본주의 체제를 상당히 흡수한 중국의 발전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 역시 북한의 엘리트들 중에서 나오게 되었다. 김정일 시대인 2002년 박봉주 총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인센티브와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는 실험을 얼마해 보지만 강경파의 반발에 의해 좌절되었다가 김정은 시대인 2012년 박봉주를 다시 총리에 임명하고 인센티브 제도와 시장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아마도 북한의 시장경제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 이것은 남한과 경제적 통합의 첫 걸음을 북한 스스로가 내딘것으로 보이며 북한을 변화시키자고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생각된다.
그런 과정에서 북한은 선전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두개의 개신교 교회와 몇 개의 외국인 교회 그리고 하나의 카톨릭 교회의 설립을 허락하였고 수많은 지하교회가 핍박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다. 아직 북한은 핍박지수 세계 1위를 다년간 지니고 있지만 사회는 다원주의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일이고 기독교가 설 자리도 차차 커질 것 이라는 전망이다.
(2) 남한의 변화
한국 전쟁 이후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개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는 것이리라. 남한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생겼고 북한에 대해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한은 민주화를 상당부분 이루어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종교의 자유 등 시민적인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어 있고 인권의 수준도 북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은 입장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국제적인 연대에도 자신있게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를 국민의 자유로운 투표에 의해서 선출한다는 절차상의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이루었고 복수 정당제도 보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남한은 전시 작전 통제권을 지니지 못해서 군사적 주권이라는 면에 있어서 미흡한 상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이제 자주 국방을 감당할 만큼 성장하였고 또 미국의 경제가 해외주둔 병력을 감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한국은 빨리 군사주권을 확립하여 북한에 대해 자신 있는 모습으로 민족의 앞날을 의논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보겠다.
V. 남북이 상호 보완 할수 있는 요소
해방 이후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북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첫째 북한은 이미 시장경제로 전환 하였고 해외로 부터의 투자자의 유치가 경제 개발에 가장 절실한 요소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시장과 천연자원을 집요하게 원하는 중국으로부터도 경제적으로 자립하기를 원하고 있기에, 북한이 실질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는 남한 밖에 없음을 알고 있고, 그 것이 김정일의 유훈에까지 나타나 있다.
한편으로 남한은 이제 비싼 노동력의 압박으로 그 앞날의 지속적인 제조업의 성장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질 좋은 저임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이 좋은 투자 대상지임에도 틀림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남북이 경제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기회는 실질적으로 열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은 남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군사력이고 또 남한을 경멸하는 것이 군사적 주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의 경제적 성장과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이 남한의 군사주권을 단계적으로 수립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남북통일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남한은 보다 많은 경제 협력을 통해 북한과 경제적 통합을 기하는 한편 군사적 주권을 확보하여 북한과 통일을 위하여 협상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지금 당면한 과제이다.
이런 준비를 해 가면서 남한은 북한에 대해 특히 인권의 면에 있어서 향상을 가져 오도록 계속 협상하고 압력을 가하여야 하되 북한의 인권유린을 고발하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예컨대 이산가족이 면회소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것, 방문자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문제, 남북의 티비방송을 자유롭게 시청하는 문제, 남북이 서로 전화와 인터넷 등을 통해 교류하는 문제, 남북교회가 합동 종교 행사를 벌리는 문제, 남북의 문화, 학술 교류 등 넓은 의미의 인권의 폭을 넖혀 가서 북한을 보다 개방되고 다원적인 사회로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1991년에 남북 의정서 협약으로 합의된 바 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남북이 준행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을 만드는 것이 통일을 향한 전진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남한 역시 북한이 대화상대로 인정할 만한 여건을 갖추는 것이 통일을 향해 나아갈 첫 단추가 될 것이다.
VI. 통일 조국의 이념적 지표
이제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이야기 해 보자. 통일을 말하면서 통일 후 사회를 그려보지 않는다면 통일 논의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지난 60여년 간 너무나 다른 체제–에서 다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채 어마어마한 국가 기관이 군림하고 있는 두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때문에 체제는 그대로 놓아두는 방식으로 연방제 통일이나 낮은 수준의 국가연합이라는 방안에서 제시되기도 한다. 설사 현재로서는 두 체제를 당분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통일이란 하나의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남북이 지향해야할 가치 정립의 방향은 남북 함께 만들어 가야 하리라.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고민과 탐색이 통일신학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1)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
가. 인간 평등의 가치.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인간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되였다. 북한 역시 건국준비 위원회 시절에 이미 토지 개혁을 실시 함으로서 평등 정책의 실천에서 남한에 비해 기선을 제압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 역시 헌법에 인간의 평등권을 명시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1987년 헌법에서는 경제적 민주화를 명기함으로써 경제적 평등도 중요한 가치가 됨을 천명하였다. 어떤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납득할 만한 수준의 평등이 실천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남북이 함께 고민하여야 할 질문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대해 선포해야 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호소력 있는 가치는 평등이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남한은 극도로 양극화 되어 있는 사회 계층구조를 평등화의 방향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이것이 북한과의 차이를 줄이고 남한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로 바꾸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견고한 계급사회로 바뀌었음을 인식하고 보다 평등주의적 사회로 고쳐나가야 한다.
나. 경제적 안락과 시장경제
식민지의 수탈로 고통당하던 한 민족은 남북간의 전쟁으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그리고 전후의 경제 복구는 남북 모두의 꿈이었다. 북한은 1960년대 초까지 경제 복구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이후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흰 쌀밥에 고기반찬을 인민이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언급하였다. 남한은 1961년 이후 경제건설을 국가 발전의 최고 목표로 삼아왔고 기적과 같은 성과를 거두어 국민들을 궁핍으로 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남북 모두 백성들의 경제적 안락과 안정이라는 목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방법이 근원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최근에 북한은 시장경제를 중심적 경제로 채택함으로 남한과의 경제적 공통분모를 형성하였다, 아직 북한은 생산수단의 자본화는 이루지 않아서 남한과는 경제 체제의 큰 차이를 갖고 있지만 우선 시장경제는 포기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갔다.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남북이 어떻게 안락한 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협력하는 가가 관건이다.
경제의 팽창과 물질적 픙요가 기독교적인 역사 발전의 지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보다 어려운 문제이다. 우선 경제의 팽창이라는 면에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 물질적 풍요를 포함하고 있음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부유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 이스라엘의 오랜 꿈이었고 다윗 왕 시기에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솔로몬 왕 시절에 실현되었다고 믿었었고 그 후 민족의 시련기에 있어 늘 그리워하고 거기에 희망을 두어 왔었다.
그러나 포로기를 겪으며 특히 예수 시대 이후, 신약시대에 와서는 한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대단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흔적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됨을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셨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천부께서는 그러한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고도 말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한 물질적 필요를 성경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 역시 발견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인간의 물질적인 탐욕을 질책하시지만 궁핍과 빈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궁핍한 채로 존엄해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샬롬은 궁핍을 포함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원성과 인간의 자유권을 이야기 할 때 경제적인 자유 다시 말해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자유, 직업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소비할 수 있는 자유 등도 어느 정도 존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소간의 사유재산도 보장되어야하고 거기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요소의 일부는 기독교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물질과 그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확보되지 않은 채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말대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을 때 인간 개개인의 개성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과 집단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계는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사회이고 그것은 현대에 와서 자본주의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성경은 노동의 귀중함 역시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면서, 인간의 존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자유롭고도 정직한 땀 흘림, 이웃에 대한 애정과 나눔을 바탕으로 한 경제의 발달과 성실과 윤리가 바탕이 된 경제생활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겠다. 국부의 성장이라는 목표 앞에 윤리도, 도덕도 다 뒷전에 놓아 버리는 성장 철학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다. 자주와 군사적 긴장완화
7.4 공동 선언 이래 외세 의존 없는 자주 통일이 남북의 공동 통일 방안으로 채택되었다. 민족의 주체는 북한에 있어서는 주체 사상으로 천명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의 자주는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도 명기된 3.1 운동과 임시 정부의 지침이기도 하다. 그것이 해방직후 김구 선생 등의 민족 지도자가 신탁통치를 강하게 반대했던 사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한은 북한의 침략으로 인해 방어전을 펴가는 과정에서 군사 작전권을 미국에 양도 하였지만 남한은 이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자주국방을 할 수 잇는 경제력을 갖추었다.
북한 역시 핵 무장이 남북의 긴장을 고조 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미군의 남한에서의 철수를 더욱 힘들게 함을 인식하여야 한다. 남북이 군사적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남한이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힘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북의 통일은 더욱더 멀어짐을 명시하여야 한다. 남북이 모두 군사적 자주권을 가진 가운데 어떻게 평화적 공존을 이룰 수 있는지가 남북이 공동으로 풀어야 할 첫 단추이고 거기서부터 군축과 두 군대의 통합까지도 논의되어야 한다.
라. 도덕주의
남북 모두 퇴폐한 물질문화를 배척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직과 신의에 바탕을 두고 성적인 질서와 가정의 중요성을 추구하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추구하는 도덕적 공동체를 남북이 모두 원할 뿐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적인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런 문화의 확립과 일치를 위해서 두 나라가 마련할 수 있는 공동분모는 많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한 남북 한글 학자 간의 교류,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사 연구와 독도 지키기 운동, 남북의 인권 개선 운동, 남북 종교 단체들이 공동 행사, 스포츠 교류 등을 통해 피차의 정치적 주장보다는 도덕사회의 구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마. 평화주의
7.4공동 선언에서 통일의 방향을 평화 통일이라고 못 박았다. 남북 모두 상대방의 진실성에는 의심을 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남북 모두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 그리고 남북 모두 전쟁이야 말로 자멸의 길임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독교적으로 보아도 인간이 만드는 공동체가 이웃에 대한 증오를 동원하는 공동체, 혹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공동체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로 행했다고 믿는 침략을 정당화 하는 역사관은, 미가, 후기 이사야 등 예언자들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극복되었고, 신약시대에는 평화주의적 관점이 강조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이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1950년에 남침을 감행한 북한의 정권이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의 제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 월남이나 이락을 침공한 미국을 모두 하나님을 배반했던 사회였다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평화의 이념은 외국과의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부적으로도 투쟁이 아닌 화해와 평형을 추구하여야 한다. 설사 이해관계의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하고 정부는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적인 방법은 즉각적인 위험에 대한 자기방어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당화 될 수가 없다. 저항이 필요하다면 비폭력적인 방법만이 용인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 공동체는 폭력 혁명을 부인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선택한 길이었고 그것이 혁명주의 노선을 포용할 수 없는 이유이다.
(2) 남이 북을 설득하여야 할 부분
성경은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국민 주권론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론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상 출애굽 시절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다수의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어리석음만 저질러 왔다. 그러나 하나님 주권설에 의한 신정정치 혹은 왕권신수설에 의한 절대 왕조 그리고 하나님께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수많은 독재체제가 얼마나 위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고, 기독교적인 이상과는 거리가 먼 잔인함을 보였었는지는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비인도적인 체제들에 대한 대안으로 민주주의가 출현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 사상적인 근거는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신약시대에 와서 만인제사장론이 확립되어 국민들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확보한다. 라인홀트 니이버도 인간은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먼저 민주주의는 죄인인 인간이 권력을 잡으면 폭군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에 집권자의 권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논거를 갖고있다. 집권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첫째, 권력자의 임기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권력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권력으로부터 물러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통치자의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나올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인간이 선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가장 조심스럽게 폭정을 막을 수 있는 장치라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에게 비판할 수 있는 자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상당한 수준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권의 보장은 단순히 폭정의 방지를 위한 장치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리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유권이 보장될 때 필연적으로 다원성 있는 사회가 유도된다.
바로 이러한 다원적인 체제의 수립을 위해서는 국민들은 정권이 비도덕화 될 때 혹은 그 권력을 남용하거나 개인이나 집단의 기본권과 자율성을 훼손할 때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참여도를 보여야 한다. 시민사회의 형성만이 민주주의를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그 시민사회가 제대로 운영되는 사회를 우리는 바람직한 공동체로 이해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자원의 평등한 배분을 보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통선거를 실시함으로 모든 국민들 개인 개인에게 최소한도의 정치자원은 부여하고 있는 제도라는 사실이 인식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기독교적인 근거의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평등주의적인 요소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세속사회에 있어서 신분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지는 않고 있지만, 예수만 믿으면 신분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면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에 기반을 둔다.
또한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이웃에 대한 관용 역시 민주주의의 기독교적 근거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국가에 의하여 강요되는 정치체제는 기독교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정치 제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나 개인을 우상화 하는 체제도 반 기독교적이다. 국가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쇼비니즘이나 나찌즘 역시 반기독교 적이다. 국가는 국민들이 존엄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터를 제공해주는 그릇일 뿐이지 절대적 숭배의 대상일 수가 없다. 물론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두고 타 종교를 억압하는 체제도 비기독교적 사회이다. 오늘날의 무슬림 혹은 불교 통치 국가들도 비 기독교적이겠지만 기독교 신정정치를 폈던 미국 초기의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도 비민주적, 반기독교적인 사회였다고 고백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이른바 기본적인 자유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기독교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허용할 수 있는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전체주의적 정치체제나 권위주의적 정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갖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인 자유권,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주권, 통치자 임기의 제한, 통치 권력의 제한 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체제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민주체제가 지금껏 고안된 체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하나님 형상 닮은 인간의 존엄함을 갖추어 줄 가능성이 많은 체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의 자유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체제가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유도하거나 방치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당장은 민주주의적 원칙을 북한에 강요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북한에도 민주주의적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권은 북한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북한에게 조심스럽지만 집요하고 일관성있게 압력을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VII. 나가는 말
시장경제, 주체와 자주, 평화주의, 평등주의, 도덕주의 등이 오늘날 남북한이 공통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이고 민주주의적 원칙과 인권 개념을 북한에 소개하는 것이 남한과 특히 기독교의 책임이라고 하겠다.
북한과 남한이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가치 중에서 도덕주와 평등의 추구는 각기 국내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남북간의 첨예한 갈등을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안락을 가져올 자본주의적 방식을 북한에 도입하는 문제는 북한의 저항을 가져올 수도 있어서 극도로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점은 남한이 북한에 강요할 일은 아니지만 남한이나 외국의 투자자의 보호와 투자회사의 경영을 위해 북한과 계속해서 협상을 벌여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평화의 추구는 북한으로서는 핵포기의 문제와 연결되고, 평화조약의 체결이라는 미국과 남한의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와 만날 수밖에 없다. 자주의 문제는 남한에서의 미군의 철수 문제와 직면할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북한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는 형편이다. 이 역시 미국의 이익뿐 아니라 소련, 중국의 이익까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신중하고 단호한 접근이 필요하다. 긴장완화의 문제는 군축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때 남북의 거대한 군사조직의 이익은 누가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느냐가 큰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남한이 북을 설득해야 할 문제이고 이것은 김정은 유일체제의 존속여부를 결정하는 문제인 만큼 오랜 시간을 두고 노력해야할 문제이다. 이 모두가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한민족의 통일을 지향할 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식하며 우리 모두가 해결 방안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