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환 목사 / 독립장로교회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서 교계의 안타까움과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보수 지형에 서있는 대부분의 한인이민교회들에게 큰 숙제가 안겨진 것이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긴장하게 되는 한 부분은 기독교의 본격적인 변두리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믿고 있지만,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를 제외하고는, 공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기독교의 변두리화는 미국 내 여러 제도를 만들 때 여실히 드러난다. 기독교는 정치인들이 성경책을 펼쳐놓고 제도를 만들어 주기 바라지만, 실제 제도는 사회복지적 차원에서의 자료와 그와 연관된 인권적 차원에서 만들어진다.
동성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동성애자들이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오니까 성병이 줄어들더라, 결혼제도 밖에 있을 경우, 배우자의 사망시 그 사람의 재산이나 연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의 경우를 보면서, 인권적 차원에서 삶의 안정성을 지켜주자 등등의 사회복지 차원의 논리가 주로 작용한다. 죄라는 논리는 이안에 없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이민교회 반응은 타락, 소돔, 에이즈, 말세라는 단어들이다.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반응이지만, 이런 반응들이 기독교가 변두리화 되는 공적 영역에서 과연 설득력이 있는 반응이 될까 싶다. 결혼의 형태로 혹은 시민결합의 형태로 동성결혼에 어떤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훨씬 인권적이면서 안정적인 사회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변두리화 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다른 방식으로 공적인 영역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정죄하는 방식은 우리 기독교 내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지 공적인 영역에서는 아무 설득력이 없다. 변두리에 선 기독교가 공적영역에서는 어떻게 기독교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비판받는 기독교의 어그러진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성찰을 해야 하나. 이런 질문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희망적인 것은 교회 역사에서 기독교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있었을 때 가장 기독교적 생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변두리에서 다시 가장 기독교적인 모습을 성찰하고 그 모습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