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기윤실 문서자료 – 동족방문여행 및 북방 소식

2014년 동족방문여행을 다녀와서

눈물 젖은 두만강

유용석 장로

1920년대 말,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3.1운동 후 일제의 압제를 피해 먼저 북간도로 이민 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이민을 갔었다. 그 때 내가 본 두만강의 물빛은 어린 기억에도 출렁이는 물결의 푸른빛이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구슬픈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내 평생의 애창곡으로 종종 불렀다. 8.15 해방 다음 해에 중국에서 두만강을 건너 평양으로 오는 길에 본 두만강의 물빛도 여전히 푸른 빛이었다.

몇 년을 북한에 살다가 6.25사변이 나서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목선을 타고 심청의 전설이 있는 장산곶 임당수를 지나 어렵게 인천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사로, 농촌운동으로, 또 무역회사의 중역으로 25년간을 살다가 1976년 2월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미국에서 나의 직업도 무역이었던 관계로 자주 해외출장을 다녔는데, 그 때만해도 중국으로 가는 직행 비행기가 없어서 홍콩을 거쳐 가야만 했다. 중국의 심양에서 아내의 친구인 심양서탑교회의 오애은 목사님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연길에 가곤 했다. 그 때 북한과 중국 국경의 도문시에 가서 다리 밑을 흐르는 두만강을 보았는데, 그 푸르던 물이 흙탕물로 변한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LA기윤실이 20년 가까이 감당해 왔던 동족사랑나눔운동은 모두가 이 두만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96년 7월에 시작한 북한 어린을 위한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은 처음에는 중국에서 빵(월병)을 만들어 자동차에 싣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의 남양, 종성, 회령시의 아이들을 먹여 오다가 1997년 10월 회령시에 빵과 국수 생산시설을 갖추고 직접 그 곳에서 생산한 빵으로 아이들을 먹였다. 1999년 4월에 시작한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처음에는 압록강을 건나 평양과 황해도 쪽으로 보내다가 그 후로는 두만강을 건너 종서, 회령, 청진, 나진 멀리는 함경남도의 부전 고원까지 500여 마리의 많은 염소를 보낸 일도 있었다. 우리 미주동포들의 사랑과 정성이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을 건너 북녘의 동포들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지난 9월 1일 밤,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북방선교여행 길에 올랐다. LA공항을 출발하여 9월 3일 연길 비행장에 도착한 후, 태환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 새벽 이현준 목사님 일행과 같이 북한 방문 길에 올랐다. 권하에 도착한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간 후 입국수속을 쉽게 마치고 나진으로 향했다. 중국정부가 닦아 주었다는 잘 포장된 나진행 도로가에는 애잔한 코스모스 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나진 거리는 전보다 더 깨끗하게 보였고 사람들의 표정도 더 밝아 보였으며, 새로운 젊은 지도자를 추켜세우기 위한 표어로 곳곳이 장식되어 있었다. 선봉에 있는 우리 빵 공장은 아담하고 청결한 실내와 잘 훈련된 여직원들이 새로 들여온 제빵기계로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만들어진 빵은 서민숙 위원의 노력으로 인근 어려운 곳의 유치원과 탁아소에 배달되어 아이들이 먹고 있었다. 서 선생이 여성다운 자상함과 모성애를 바탕으로 쉽지 않은 일들을 잘 감당해 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흐뭇했다.

2박 3일의 일정을 모두 마친 우리 일행은 토요일에 원정리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중국으로 나오는 두만강 다리를 다시 건넜다. 다리 아래로는 우리 민족의 애환의 역사를 담은 두만강이 애처롭게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두만강을 못 보겠지. 잘 있거라 두만강아, 다시 못 볼 두만강아!

이번 여행에서 고락을 같이 해 준 두 분 목사님과 사랑으로 맞이해 준 ㅅ선생, 그리고 이번 여행을 가능케 해준 사랑하는 LA기윤실 회원 여러분들께,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4년 북한을 다녀와서

이현준 목사

북한 라선시에 세워진 LA기윤실의 빵공장 방문을 위해 2014년 9월 초, 우리는 LA를 떠났다. 이번 여정이 뜻 깊었던 또 다른 한 가지는, 지난 1998년부터 그 땅을 품고 전심전력을 다해 동족들과 아이들을 돕는 일을 감당해 오신 유용석 장로님을 모시고 갈 수 있었던 점이다.

이제 어느덧 구십을 바라보시는 유장로님을 만난 것은, 개인적으로 나에겐 큰 축복이다. 2003년 유 장로님과 함께 그 땅을 밟으면서 나는 그분처럼 그 땅을, 동족들과 아이들을 가슴으로 품게 되었다. 거의 매년 그 땅을 밟으면서 지난 10여년 라선 땅이 어떻게 얼마나 변화되어져 왔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북한 주민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라선시는 특별 경제도시이자 중국과 맞닿아있어 수많은 물자들과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다.

정말이지 10여년 전의 라선과 오늘날의 라선은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변화가 어느새 그 땅 곳곳에서 조용히 진행되어지고 있음을 보며 우리의 기도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믿게 된다.

LA기윤실의 동족돕기 사랑나눔 운동을 시작하신 유장로님께서, 어쩌면 당신의 마지막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떠났던 라선 여정이었다. 북한의 라선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초가을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지난 2월에 LA기윤실의 파송을 받고 현지 빵공장 책임자로 가서 열심을 다해 일하고 있는 ㅅ 선생의 수고로, 우리 일행은 무사히 라선 땅을 밟았다.

작년과 달리, 새로 지은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입.출입 수속부터 새로운 모습이다. 줄지어 들어가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라선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로 출입국장은 부산했다. 수년전만 해도 국경에서 라선 시내까지 2시간이 넘도록 달려야 했던 울퉁불퉁한 산길은 이제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 도로가 나 있다. 도로와 통신과 전기의 기본 인프라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기에, 앞으로도 더 많은 합자/ 투자 기업들이 몰려들 올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역시 우리 미주 교포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완성된 선봉에 있는 빵공장이었다. 그곳 책임자로 빵을 만드는 분과 19살 막내 자매가 열심히 빵을 만든다.

하루에 2000개의 이 빵들은 최고의 재료와 정성이 들어갔다.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맛없는 중국분유 대신 찾아낸 뉴질랜드 분유와 라선 현지에서 조달하는 닭알(계란)과 밀가루가 들어가는 공정이다. 상해에서 들여 온 새 빵 굽는 기계는 최고의 맛과 품질의 빵을 생산하고 있다! 어느 북한 분의 어린 아이는 다른 우유나 음식을 먹으면 토했는데, 이곳의 빵은 그 자리에서 3개를 먹더란다.

10여년 전 처음 왔을 때 맛 보았던 사랑의 빵보다 더욱 맛있어진 이 빵은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모르겠다. 라선(라진과 선봉)의 20만 주민들이 먹을 먹거리를 만드는 라선식료공장의 입구에 새로 지은 LACEM(기윤실) 빵공장은, 실로 그 땅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빵 공장을 둘러 본 후, 우리 일행은 최근에 새로 지어진, 동명산 3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거의 모든 여행객들이 묵는 이 호텔은 라진항구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호텔을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온 수많은 일과 작업 환경 속에서, 북한 동족들은 참으로 다양한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준비되어져 있다는 걸 느꼈다.

둘째 날의 여정은, 우리가 만든 빵을 먹는 유치원과 탁아소 가운데 아직 한 번도 가보질 않은 가장 멀리 있는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굴포라는 지역을 지나는 꽤 먼 길을 달려 우리는 먼저 라선식품공장이 직영하고 있는 농장을 방문했다. 옛날 시골에서 맡았던 퇴비냄새 가득한 곳이었다. 멀리 두만강이 보이는 땅 끝 지역에서 돼지와 닭, 염소가 사육되고 있었다.

그 농장의 한 켠에, 우리에게 투자를 부탁하는 양계장 터가 있다.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양계장에서 500마리정도 닭을 키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LACEM 빵공장에서 매일 필요로 하는 닭알(계란)로 원금을 갚아 나가면 될터이니, 손해볼 일 없는 윈-원 프로젝트이다.

지금 그 땅에 필요한 것은, 과거와 같이 100% 기부(Donation)보다는,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일을 할 수 있고 기술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합자/투자형 사업(Empowering)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요한 자본을 저금리(Micro Financing)로 대출해 주고 스스로 자립하고 생산을 해서 갚아 나갈 수 있는 형태의 사업들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방문한 라선인민병원은 새 건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부의 각종 의료기구들은 너무도 부족해 보였다. 제대로 된 초음파 기계가 없으니 아픈 환자는 우선 수술해서 상처를 열어봐야 한다. 사용하지 않고 있는 최신 의료 장비들을 속히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북쪽에서는 동족들을 향한 마음이 있는 의사들이 들어 와 의료적인 도움과 의료 기술을 나누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누군가를 통해서, 실질적인 의료장비 기부와 의료 기술 이전 등의 기회가 생기기를 기도드린다. 저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요 우리 민족의 통일세대를 이끌어 갈, 우리의 아이들이 아닌가!

마지막 날 나오는 길에 한 과수원을 들렀다. 아름다운 가을 하늘 아래 익어가는 과일들을 보았고, 직접 따주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이다. 시원하고 상큼한 사과의 맛은 청명한 가을 하늘과 어우러져 큰 기쁨을 주었다.

그 땅에 머무는 동안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보이는 모든 이들, 마주치는 모든 분들을 마음으로 축복했다. 그리고 이번 여정에서 느꼈던 가장 큰 은혜는, 이미 그 땅에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 땅의 가득한 코스모스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원한 가을 바람, 그리고 개발되고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이미 그 땅에 당신의 존재를, 은총을 드러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돌아왔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축복하리라. 이제 머지않은 그 날이 더 속히 오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해 본다. 2014년 9월의 라선 방문은, 하나님의 은총 가득한 축복의 여정이었다.

북방소식

ㅅOO 위원

겨울이 봄으로,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가을로 변하는 계절들을 지나며 연길로 온 후의 시간들이 점점 길어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선봉에 있는 우리 빵공장도 이제는 자리가 꽤 잡혀가고, 공장에서 만나서 반갑게 인사 하는 사람, 낯 익어 미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늘어 이젠 빵공장은 어느덧 익숙한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빵공장에서 만드는 빵은 라선에서는 기술자가 없어 우리의 빵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Tommy 다음으로, 빵 만드는 조선족 청년과 중국 청년을 초청을 했습니다. 우리 같은 외국인과 달리 중국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공장에서 초청장만 내면 쉽게 들어올 수가 있었기에 식품공장 지배인이 초청장을 내주어 이 두 청년은 우리 공장을 방문 하여 몇 가지 종류의 빵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ㄱㅎ는 조선족 청년입니다. 우리 빵공장에 두 번을 방문 하여 빵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우리 빵공장이 빵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는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학교라는 이름을 내걸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빵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 계속 되어, 우리 빵 공장에서 일하는 경희같은 아이들이 빵 기술을 배워 앞으로 그 기술로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 마음을 빵공장을 통해 배우기를 원합니다.

경희는 19살, 학교를 막 졸업하고 처음으로 우리 빵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렇게 세 식구가 같이 산다고 합니다. 웃음이 별로 없는 경희는 나를 보면 수줍은 모습으로 미소 짓습니다. 처음 경희가 빵공장에서 일하게 된 날, 원래 일하던 은별이는 안보이고 더 어려보이는 경희를 보며 새로운 얼굴에 의아해 했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얼굴이 무척 정이 갔습니다. 모든 일에 서툴고 무엇을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모습이 이제는 말을 안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필요 한지 알아서 빠르게 일 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빵 책임자가 만든 빵 반죽을 경희는 빠른 손으로 빵 판에 짜 넣습니다. 그 손이 얼마나 빠른지 처음에 가르쳐 주었던 빵 선생님보다도 더 빠른 것 같습니다.

경희에게 이 첫 직장이 무엇을 심어 주고 있는 걸까 생각 해 봅니다. 이 아이에게 심어 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정말 그렇게 되고 있는 걸까 제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어딘가에서 씨앗이 뿌려져 자라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선봉은 요즘에 나쁜 전기 사정이 가뭄으로 인해 더 안 좋다 합니다. 그래서 많은 공장들이 낮에 일 하는 대신 전기를 많이 안 쓰는 밤에 일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이틀치 빵을 생산 합니다. 처음에는 의아해 했던 나의 마음이 밤에 일 해야 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면 미안 한 마음까지 듭니다.

발전기를 돌리려고 해도 발전기 돌리는데 필요한 디젤 비용이 너무 나간다고 힘들어도 밤에 일하겠다는 직원들이 고맙기도 하고, 내가 이전에 누렸던 풍요로움이 이곳에선 너무 귀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런 없는 곳에서 귀한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 했던 것들이 감사해야 하는 것들임을 배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들은 아침 일찍 선봉 탁아소 물자공급소에서 온 트럭에 실려져 40여 군데로 배달됩니다. 이렇게 선봉 구석 구석 탁아소와 유치원에 공급 되는 우리 빵들이 아이들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LA기윤실 방문 때 우리 빵이 가는 선봉시에서 한 시간 떨어져있는 부포 탁아소와 유치원에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어느 곳이나 다 똑같습니다. 예쁘고 깨끗한 옷이 아니더라도 깨끗이 씻겨진 얼굴이 아니더라도 예쁜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번 겨울에 어떻게 춥지 않게 지낼까요. 작년 겨울에 입던 옷, 신발들은 작아졌겠지요. 모든 것이 부족 한 이곳에는 방 안도 따뜻하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와주고 싶어도 마음대로 도와 줄 없는 이곳,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 한 곳에 우리의 사랑과 정성이 가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그곳에 사람의 힘이 아닌 주님의 따뜻함이 같이 하길 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의 정성과 기도로 이루어 진 것이기에 우리는 모두 동역자입니다. 우리 빵공장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나누어지기를 계속 기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ㅅOO 위원은 LA기윤실이 북한의 선봉에 세운 사랑의 빵 공장 책임자로 파송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최광렬 목사

친애하는 LA기윤실 회원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 올립니다. 중국의 한 구석에 있는 어린 학생들을 기억하고 이들이 꿈과 용기를 갖고 자라도록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신 기윤실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특히 태평양을 건너 먼 길을 오셔서 친히 꿈나무들을 격려하시고 어루 만져주신 그 귀한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연로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땅을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유 장로님께 감사와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장학회의 품에는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에 힘입어 새록새록 크고 있는 학생들이 167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더 늘어갈 예정입니다. 이들은 이 사회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어려울 때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을 펼치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장학금은 공부만 잘한다고 주어지는 성적장학금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장학금의 수혜자 가운데에는 히브리키즈가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커녕 어른들의 잘못으로 더 버거운 삶을 살아야하는 이 시대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품은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입니다.

그동안 저희는 골안(낙후된 시골을 의미하는 현지말)의 학생들을 도시로 초청하여 단정한 장소에서 장학금 전달식을 치르곤 하였습니다. 이날만큼은 구석진 골안의 아이들을 예수님처럼 대접하고 싶은 것이 저희의 마음입니다. 중국의 동북지역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꽤 이름난 호텔에 모여 미국에서 오시는 선생님들의 격려 말씀을 들으며 장학금과 선물을 받고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만찬은 어린 동무들을 위해 주방장을 채근해 차려진 부폐식으로 합니다. 식탁에는 아이들과 한국과 미국에서 온 어른들이 함께 자리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장학회가 마련한 기회가 아니라면 이런 도시에 나와 볼 기회가 없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 늘 주변의 짐처럼 여겨졌던 아이들이기에 이 호사스러운 분위기가 낯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금방 깨닫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여건이 비록 암담하고 아득하지만 ‘나도 소중한 존재’인 것을 말입니다.

올해의 장학금 전달식은 예전처럼 한 자리에 모여 하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직접 아이들의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전에 하던 방식이 나쁘다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하여서입니다. 백두산 아래 장백부터 길림성의 끄트머리인 양춘까지 우리 장학생이 있는 학교를 하나하나 찾아다녔습니다. 각 학교를 방문하면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교장실로 부릅니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격려하고, 저희는 준비해 간 선물과 장학금을 전달합니다. 학생들은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멀고 험한 시골길을 달려온 저희를 보면서 반가워하고 감격해합니다. 그렁그렁 눈물을 맺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다음은 그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저는 2학년 김란화입니다. 오늘 태환장학회에서 주시는 장학금을 받게되여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학금을 마련해주신 여러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처음 태환장학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타게 되였습니다. 이 장학금은 저에게 작은 동력으로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장학금을 탄만큼 금후 더 열심히 학업에 열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태환장학회도 영원히 저의 가슴 깊숙히 새겨둘 것입니다. 조선족학생들을 위해 매년마다 장학금을 마련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강원빈이라고 합니다. 먼저 저에게 장학금을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이런 장학금을 제게 주시는 건 제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많이 부족하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폭 넓은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조금이라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초중 2학년 2반 최경미예요 .태환장학회 회장님과 여러분들이 추석을 뜻깊게 보내시고 유쾌하시길 바랍니다. 장학금을 받고나니 저의 심정은 꿀물을 마신 듯 달콤합니다. 동시에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평시에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요!

존경하는 선생님, 기나긴 기차여정을 거쳐 오늘 오전에 저는 무사히 무한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갖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선생님께서 연길에서 직접 장학금을 전달해 주시고 선물까지 주시면서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몇 년에 한번밖에 보지 못하는데도 해마다 기억해 주시고 따뜻한 마음을 전달해 주시는 태환장학회의 마음이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 고마운 마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저도 저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에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고마워도 고마움을 맘껏 표현하지 못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감사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할 줄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반드시 따뜻하고 온화한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건강한 인생을 펼쳐갈 수 있는 것은 기윤실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 덕분입니다. 우리의 작은 힘으로는 모든 인류를 구할 수 없지만 지금 이곳의 아이 하나를 구하는 것이 곧 인류를 구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사랑을 모아 주신 여러분께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최광렬 목사님은 중국에서 조선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 태환장학회의 책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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