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기윤실 문서자료 – 포스트-2007 시대와 한국 개신교의 미래 / 양희송

포스트-2007 시대와 한국 개신교의 미래

(Post-2007 era & the Future of Korean Protestantism)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

yangheesong@hotmail.com

1.

이 책은 2007년 여름 강의안 형태로 구상되어, 그 해 말 글로 정리되었고, 2008년 8월 [복음과상황]에 “포스트-2007 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공개되었던 글의 확장판에 해당한다. 그 무렵부터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이렇다. “한국교회의 불안한 폭주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2000년대 초반부터 교회 세습 현상은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거의 한 체제의 말기적 증상처럼 보일 정도로 맹목적이고, 저돌적이다. 한국 사회 전체와 불화하는 것도 갈수록 심각해진다. 나는 이런 현상이 2007년 한 해 동안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몇 가지 상징적 사건들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를 ‘포스트 2007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제안을 했었다. 이제 그 문제의식을 책으로 엮으면서 담아내고자 한 것은 책 발간 전 행한 세미나 취지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국 개신교는 숫적으로는 성장 침체를 겪고 있고,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거의 얻지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내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합의된 입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 어떤 대안이 필요하며,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실종되어 있습니다. 이 세미나는 개신교의 최근 30년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시효를 상실하였는지,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될지를 내다보는 논의의 장을 제공합니다.

2.

전체 3부 총9장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는 먼저 냉정히 상황 파악부터 했다. 제1부는 통계를 통해, 개신교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지난 30년간 개신교 인구 변화에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두에게 공개된 이런 자료들은 일부 연구자들의 논문으로만 전해졌고, 그것이 담고 있는 실천적 함의는 대중적으로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다. 예를 들어 1985년, 1995년, 2005년 종교인구 변동 폭이 시사하는 바, 특히 개신교 인구가 첫 10년간(1985~1995) 227만 명이 늘었는데, 그 다음 10년간(1995~2005)은 14만 3천 898명이 줄었다는 것이 던지는 둔탁한 충격파를 실감할 필요가 있다.

자료를 더 들여다보면 개신교의 지역적 분포와 세대적 분포가 매우 편중되어 있어서 현재의 개신교가 ‘수도권 거주 40대 남성’ 정도로 대표된다는 것도 곰곰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나는 개신교 인구가 10~30대와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감소하고 있는 상황과, 지역적으로 수도권의 강남 지역에 전국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개신교 인구가 있고, 계층적으로는 예를 들면, 국회의원의 37%가 개신교인인 것을 비롯해 한국사회 중상류층을 개신교인들이 과잉 점유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되짚어 보았다. 무시 못할 힘은 갖고 있지만 점점 소수화되어 가는 이런 처지가 교계 지도자들의 조급한 언행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이런 현상을 돌파하고자, 강도와 빈도와 규모를 증가(하여) 하는 그간의 전략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입장이다. 아니,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무얼 열심히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시간이 흘러가면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간 30년을 지배해 온 패러다임이 시효를 다했고, 지금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인지부조화의 시대, 즉 기존의 관점으로 더 이상 세상이 설명되지 않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관찰이 틀리지 않다면,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시기의 주요한 오류 양상을 잘 규명하고, 이를 넘어설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하리라.

3.

제2부에서 나는 이 모든 현상들이 흥미롭게도 ‘개신교 실패(Protestantism failure)’로 수렴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 현상을 지적했다. 목회자와 관련해서는 ‘성직주의(clericalism)’, 교회와 관련해서는 ‘성장주의(commercialism?)’, 선교와 관련해서는 ‘승리주의(triumphalism)’를 꼽을 수 있다고 보았다. 각각의 구체적 양상은 각 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전체적으로 한국교회는 16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지향했던 핵심적 가치들에서 무분별하게 이탈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자신들이 발원한 신학적․사회학적․역사적 원리를 심하게 왜곡하거나,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성직주의(clericalism)’란 중세시대 성직자들이 국가와 사회의 전 영역에 제한 없이 특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던 용어로, 교회 내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존재론적 차이로 확립해 놓은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개혁자들, 특히 루터는 중세교회에 대한 비판에서 성직자에 대한 비판을 빼놓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이 공유한 ‘만인제사장론’이나 ‘직업 소명론’은 한편으로 세속 직업을 성직의 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면서, 다른 한편 유일한 성직이었던 목회자의 위치를 여러 직업군 중의 하나로 상대화한 측면이 있다. 개신교 원리를 제대로 배운 이들이라면, 이런 상대화를 목회자에 대한 인격적 폄훼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런 ‘직업에 대한 소명론적 이해’ 대신, 손쉬운 ‘성속 이분법’이 강화되었고, ‘성직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영위하느라 빚어진 무리수가 이제는 그 체제 자체를 붕괴시킬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목회자 양성과정의 무책임성과 물량주의, 목회자들의 사역 기회가 이미 포화상태를 넘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의하면, 2012년 3월 현재, 개신교 목회자는 118개 종단에 14만 483명이고, 교회는 7만 7천 966개소인데,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114개 종단이 더 있다고 한다. 2011년말 기준으로 전국의 편의점 수가 2만 개를 넘었다는데, 향후 10년 정도 지나면 4만 개를 내다본다고 업계에서는 예측하고 있다. 골목마다 자리를 잡고 있는 편의점보다도 더 과밀한 생존 경쟁체제에 내몰려 있는 것이 개신교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개신교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목회자 수는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신학’의 위기 이전에 ‘직업’의 위기다. 교회의 위기는 한국 사회 자영업의 위기와 겹쳐지고, 부교역자의 열악한 처우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에 다름 아니다. ‘소명’을 내세워 ‘노동’을 폄하한 후폭풍이 이렇게 불어오는 것은 아닐까? ‘교회 세습’은 이런 구조에서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문제를 피해가려는 너무나 예측 가능한 시도 아닌가?

목회자만 문제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교회 성장’이란 이름으로 성도들과 목회자가 편안히 공모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교회의 건강과 바람직한 존재 방식에 대한 평가 지표를 갖지 못한 탓에, 매출로 회사를 평가하듯 성도 숫자와 헌금 액수로 교회를 평가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목회자-성도간에 딜(deal)이 이루어진다.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무한 증식’을 목표로 하는 목회는 이에 문제를 느끼는 성도들의 이탈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이탈의 한 양상을 ‘가나안 성도’라 이름하고, 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교회가 어떤 종교적 집단주의(religious collectivism)로 퇴화하지 않으려면, 종교개혁 이래로 등장한 개인으로서의 교회(church as individual)를 먼저 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각 개인의 신앙적 자유와 독립성을 각성시키고 훈련하는 일에서 성패를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성직주의’는 그간 ‘성장주의’와 손잡고 사이좋게 교회를 망가뜨려 왔다. 이를 극복하려면 교회론의 혁신이 필요하고, 그 기반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목회자 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지하철에서, 명동거리에서, 혹은 사찰 경내에서 그토록 무례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단지 그들에게 ‘무례’하다고 더 자주, 더 심하게 지적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럴 것 같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신앙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 오직 ‘선교’ 아니면 ‘전도’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교는 대화나 설득도 아니었고,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고 구슬려 우리 편으로 만드는 행위에 가까웠다. 우리의 생각 속에 나 아닌 남, 즉 타자(the Other)의 자리가 없었기에, 그간 타종교에 대한 공세적 행위들은 남을 공격하기 위한 행위 이전에 자신의 ‘신앙 고백적 표현’ 즉 ‘표현의 자유’ 쯤에 해당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 정권에서 비판받은 수많은 ‘종교 편향’ 행위의 수행자들도 아마 거의 ‘편향’이란 의식 없이 그런 일을 했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역사적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근본주의적 배타성으로 인해 빚어진 종교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반추하면서 ‘인정할 수 없지만 용납해야만 하는’ 타자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이 서양의 근대를 열고 근대적 정치체제 안에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를 장착하게 된 이유라고 보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그런 근대적 사고를 스스로의 작동 원리와 잘 조화시키면서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개신교는 이런 근대적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지켜냄으로써 ‘공적 영역(public sphere)’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역할을 했다. ‘종교적 타자들’의 자유를 확보해 줌으로써, 개신교는 자신들이 견지하는 가치의 포괄성과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치중립적 ‘공론장’을 펼쳐낼 수 있었고, 이것은 좁은 의미의 선교나 전도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을 낳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을 무한 증식함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고 제압하는 방식 외에는 선교를 알지 못한다. 그 결과 닥치는 대로 자신들에게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이해 당사자로 달려들고 있다. 그것이 ‘시청 앞 기도회’가 되든, ‘기독교 정당’이 되든, ‘장로 대통령’이 되든 말이다.

4.

제3부에서 다루는 대안은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변화의 주체가 가져야 할 속성이 무엇인지 제안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주체들 간의 연결과 만남의 방식이다. 나는 전자와 관련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꼽았다. ‘논리’, ‘열정’, ‘윤리’로 옮길 수 있을 법한 이 덕목들은 지금 한국교회에 결여된 것이면서 동시에 전진을 위해서 꼭 장착해야 할 항목이다. 앞으로 등장하는 변화의 주체들은 이 세 가지를 삼위일체처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변화를 담아내는 틀은, ‘(대형) 교회’가 아니라 ‘(개신교) 생태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룡이 되어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우리는 착각을 한다. 대형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닥에는 그런 취약한 논리가 깔려 있다. 아니다. 대형교회는 단지 ‘많은 일’을 할 뿐, 그것이 더 ‘큰 일’이란 보장은 없다. 나는 심지어 아메바도 존재 가치와 역할이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교회’여야 한다. 그리고 그 생태계의 초기 형성을 위해서는 ‘지식 생태계’가 꼭 필요하다는 것과 ‘시민사회 생태계’로 한국 사회와 만나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영성을 추구하고, 경건을 수행한 방식을 과감히 변화시켜서 ‘세속성자들(secular saints)’이 까마득히 등장하도록 하자는 꿈을 제안하였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이런 성자들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고, 오늘날 이런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성자들이 세속사회란 장을 굳이 떠나지 않고 등장해주기를 청한 것이다.

5.

이 책이 출판되고 지난 6개월간 과분한 호평을 받았다.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진지하게 책을 읽어주었고, 더 많은 청장년 성도들이 이 책을 읽고 오랜 갑갑증을 풀었다며 환영했다. 어떤 부분은 시비 없이 공감을 표했고, 어떤 부분은 참신한 제안으로 받아주었다. 여전히 세부적인 면에서는 토론의 여지가 많이 있을 것이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대안을 만들어야 할 지점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토론의 촉진자로, 혹은 대안 마련의 불쏘시개로 사용되었다면 나는 그로 족하다. 모두가 ‘개신교 생태계’의 형성을 위해 과감하게 나서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 이 글은 LA기윤실 공개강연 ‘다시, 프로테스탄트’ 에서 발표된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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